일과삶 디자인 연구소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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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고민

"은퇴 후, 롤모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O:nle 2023. 11. 2. 13:23

"일을 그만 둘 때쯤되니 주변에서 '이제 뭐할꺼야?'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 질문을 참 불편했어요. 본질은 '뭘로 먹고 살껀데?'라고 묻는 것이니까요. 지출을 줄이고 일하지 않고 살겠다고 답변하면, 다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을 평생하던 사람이 안하면 폭삭 늙고 망가진다'고. 저도 안가본 길이라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친구를 찾아봐도 주변엔 없더라고요. 그런데 아주 가까이서 제 롤모델을 찾았습니다. 아내입니다. 아내는 일(돈을 벌기위한 노동)을 하지 않았지만 건강하게 지혜롭게 살고 있으니까요."

 

위 사례자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일을 그만두고, 관련 협력사에서 대표이사로 5년간 이어서 근무하다 은퇴하게 됐습니다. 그는 가족과 논의해, 더이상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 소비를 줄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돌려받은 24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지요.

 

나 - 직장, 직업 = 0. 나를 표현하는 방식은 오직 직장과 직업이었던 사람으로 수십년 살아왔습니다. 명함 없이 사람을 사귀고 교류해본 경험도 전무 합니다. 취미나 운동도 모두 일 때문에 하는 부분이 많았으니까요. 이런 베이비부머세대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롤모델이 없다는 겁니다. 고령사회, '액티브 시니어'의 출연, 세컨라이프 등.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피부에 와닿는 롤모델을 찾을 수 없지요. 그런데 직함없이도 사람들과 잘 교류하고, 큰 돈을 들이지않고도 윤택한 삶을 사는 인류가 있습니다. 바로 전업주부로 살아온 여성이었습니다. 사례자 A씨는 아내를 잘 관찰하고 자신도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됐다고 합니다. 

 

'처음'을 즐기며 취향 쌓기 

크고 작은 선택이 축척되면 나의 취향이 됩니다. 취향을 쌓다보면 '나 다움'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그간 '직장인'으로 살다보니 자신의 특성과 개성을 고려한 선택이 어려웠을 겁니다. 은퇴하고난 후 A씨는 취향을 살려보기로 합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춤을 배워보기로 했지요. 그리고 아파트 화단에 반려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잘 아는 일만 해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해오던 것과는 무관한 일을 시도해본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바보처럼 움직이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벌써 1년이 넘게 배우고 계시다고 합니다. 몇차례 실패를 했지만 올해는 고추를 한 번도 사지않고 직접 길뤄서 드시고 있다고 합니다. A씨를 보고 지인들도 함께 참여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초보자가 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했던 동료들은 결국 한  두 번 나오다 그만두었지요. 낯선 환경에 나를 던져보는 일, 미숙련가가 되는 일.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야에선 무능한 나를 수용할 수 있는 도량도 있어야 하지요. 

 

전문성 없이도 봉사하기

인간은 나이가 들 수록 '보람된 일'에 비중을 높입니다. 누군가에게 '가치있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전문성을 그대로 활용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꽤 행복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악기를 잘 다루는 데, 누군가를 위해 연주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또는 내가 의사인데 제3국의 의료시설이 낙후된 곳에서 의료봉사를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커리어를 그대로 활용해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직업군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대다수가 직업인이아니라 직장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봉사활동은 할 수 없나요? 아닙니다. 전문성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례자는 근처 복지관의 홈페이지에서 봉사자를 구한다는 공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청해 지체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야외활동을 돕는 일을 하곤 합니다. 같이 등산을 하거나, 소풍을 나갈 때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돕고 있지요. 

 

적은 돈으로 학습하기

자녀들의 사교육에는 큰 돈을 써오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투자는 회사가 해줄 때 외에는 직접 해본 적 없습니다. 특히나 은퇴하고 나면 노후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자신을 위한 사교육비에 큰 돈을 쓰기엔 망설여집니다. A씨의 아내를 보니 집근처 여성지원센터나 평생학습관, 대학교, 도서관,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종종 이용한다고 합니다. 롤모델을 따라 A씨 또한 다양한 프로그램들 살펴보았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장애를 가진 아동과 다양한 활동을 늘려가길 원했는데, 마침 배울만한 교육프로그램들이 눈에 뛰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목표를 삼고 학습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어려운 점이 있다면, 보통 평일 낮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라 90% 이상 여성들이 참여하기에 겸연쩍고 어색했다고 합니다. 은퇴한 남성들의 활동이 좀 더 활발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운동하기 

A씨는 자전거를 타거나 걷기와 같은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없이 걸어본 적이 언제였는 지 생각이 나질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퇴 이후에 여유롭게 동네를 거닐고, 가까운 산을 찾아가 걸었다고 합니다. 몸에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 숨이 가쁘게 걷는 일은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에너지를 얻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머리로 하는 일과 신체를 사용하는 일에 균형감을 갖고 생활하시는 분들은 보다 활력이 넘칩니다. 무엇보다 그 활동이 자율성이 보장되기 때문이지요. 

 

'일(임금노동) 없이도 건강히 살아가기'가 목표였던 A씨는 지금 만족스러운 삶을 설계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이 만족스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지출을 줄이고 그동안 썼던 시간과 달리 시간을 쓰고, 그동안 만났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동안 가지 않았던 공간에서 활동하며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변화된 삶 속에서 얻은 영감과 성찰은 또 다른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만의 길을 내고 계신 분들은 만나면 참 멋스럽단 생각이 듭니다.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멋진 어른들은 전혀 올드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방식만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신선한 에너지를 전달한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