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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고민

싱글에서 엄마, 직업을 고르는 눈이 달라진다

O:nle 2024. 3. 27. 23:05

20대에 제 이상형은 둥글 둥글 포근하고 키가 큰 남자였습니다. 직업도 집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30대 제가 직업인의 삶을 살게 되니, 남자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직업인으로서 어떤 태도와 능력을 갖춘 사람인지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에 관심이 생기자 남자의 직장이 결혼생활에 적합한 지, 아이를 키우기에 괜찮은 환경인지 관찰하게 됐죠. 40대가 되니, 요즘 싱글인 친구들에게 배우자의 조건으로 또 다른 것을 얘기합니다. 시부모님의 노후가 준비돼 있는 지, 남성이 정신적, 경제적으로 얼마나 자립을 이루었는 지, 삶의 지향성이 비슷한 지 등등 고려사항이 더욱 고차원적이고 다양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싱글들이 바라는 배우자의 조건은 보다 구체적이고 다면적 입니다. 덕분에 결혼의 문턱이 점점 높아지지요.

직장을 고르는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초년생 때는 “일만 시켜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하는 자세입니다. 월급은 주는 데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경력을 쌓으면 소위 일 머리가 생깁니다. 이제 채용공고문과 지원 서류의 양식만 봐도 이 조직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구인을 하는 일련의 과정과 면접때 질문만 들어봐도 회사생활이 일부가 머리로 그려집니다. 일을 해본 만큼 보이는 법이지요. 이제 직장과 직업을 고르는 시야가 2D에서 4D수준까지 입체적으로 변합니다. 선별하는 데 숙고할 수밖에 없지요.

더불어 우리는 생애주기에따라 삶의 중요 순위가 변합니다. 사회초년생때는 '자립'이 최우선의 목표입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갖고 있는 것 중, 돈으로 교환하기 가장 빠른 능력을 활용합니다. 전공을 살려 구직활동을 하는 게 가장 빠르게 취업하는 길이라면,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첫 단추를 끼우고 일 하다보면 내가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 지, 무엇을 가장 의미있는 성과라 생각하는 지. 나를 탐구하는 데 유용한 데이터를 쌓아갑니다. 보다 만족할만 일, 만족할만한 직장을 찾아 커리어를 점차 쌓아갑니다. 
 
그렇게 1인가구에서 2인가구, 3인가구로 가족의 단위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름 앞에 다양한 역할이 생깁니다. 그만큼 삶이 여러층으로 레이어드되면 '일의 의미' 또한 변합니다. 변화된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직장, 또는 직업이라면 일을 지속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일을 멈추게 됩니다. 이때 '경력단절'이 생기지요. 다행히 아내, 엄마, 주부라는 이름으로 여성은 해야할 일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게 다른 수식어로 살다보면 불연듯 '노동자'로서의 나를 키우고 싶은 욕구가 높아집니다. 특히나 노동시간이 긴 우리나라에서 '노동하는 나'가 정체성에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임금노동을 하지 않을 때 결핍되는 부분이 크지요. 그러다보니 사회 재진입을 위한 준비가 시작됩니다.  
 
진로방향을 설정할 때, 싱글일때와는 다르다는 걸 느낄겁니다. 온전히 나 하나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시스템'을 고려해야합니다.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가족 시스템안에 나의 일을 포갰을 때, 무리없이 운영되야합니다. 당연히 '시간'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출퇴근 시간이 짧아야하고, 근무외 시간 잔업이 많은 직업도 배제하게 됩니다. 이런 조건을 더 강력하게 요구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급여가 현저히 낮습니다. 물론 꾸준히 일해온 경력자보다 급여가 낮은 건 문제될 것이 없지요. 다만 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정당한 급여를 받을 수 없다면 그 밖의 조건을 꼼꼼히 따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들 키우누라 경력단절 7년차입니다. 석사마치고 박사 과정 중 대학 강의도 나갔습니다. 이전처럼 강의를 하기엔 아이를 돌볼 수 없습니다. 가까운 곳엔 제가 출강할 곳이 없으니까요. 아이들을 키우며 일하려면 가까운 곳에 위치한 회사에 들어가 실무를 해야죠. 다시 취업하려고 면접을 보는데 사회생활 시작한지 1~2년된 제자들의 급여를 제시하더라구요.  제 입장에서 최저시급받고 일하는 데, 이 돈을 벌기위해 자녀를 돌보는 부대비용이 너무 큽니다. 학원도 더 보내야하니까요. 최저시급에서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까지 빼고 나면... 남는 것도 거의 없죠. 그러다보니 다시 취업하는 게 망설여집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또 원하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 일을 하는 게 맞는 건지 끝없이 고민되죠."
 
크게는 2가지 유형의 진로방향이 그려집니다. 첫 번째는 빠르게 사회재진입하기에 유리한 직무로 구직활동을 합니다. 자립보다 '돈'이 큰 이유입니다. 자녀의 교육비 등 가족 수가 늘어난만큼 늘어난 지출금을 충당하기 위함입니다. 이럴경우 이전 경력을 살려보거나 플랫폼 노동자, 크라우드 워커(Crowd worker)로서 수행한 만큼 수익으로 맞바꾸는 일을 합니다. 이 유형은 사회에 재진입이 빠르고, 일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다보니 새로운 정보 속에서 또 다른 진로 방향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가족 시스템을 고려한 새로운 진로를 찾습니다. 이전 경력과 무관한 일을 희망하기에 당장 취업은 어렵습니다. 따라서 직무능력을 향상시키기위한 재훈련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통 자격증을 따기위해 노력합니다. 이 경우 실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경우가 첫 번째유형보다 적습니다. 그래서 자격증 수집으로 끝나는 경우도 높습니다. 자격증이 취업에 그리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경력단절 여성들이 대부분 유사한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련분야로 진입하려다보니 공급과잉입니다. 보통 보육, 보건, 복지, 사회적서비스 영역이 그러합니다. 당연히 급여는 낮아집니다. 그러나 취업을 하게되면 '노동자'로서 자신이 원하는 역량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족시스템을 고려해 선택한 직업이기에 만족도가 높은 편입니다. 
 
저는 여성들에게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유형의 노선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가나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들은 보통 '결말'을 정해놓고 직업상담을 진행합니다. 진로 목표가 대학원 진학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면 곤란하지요. 단순 노무직, 4대 보험 가입이 안되는 회사에 입사하거나  프리랜서도 곤란합니다. 성과로 잡을 수 없으니까요. 구직활동을 할 때도, '알선'이라는 성과를 얻기위해 직업상담사들은 불필요한 과정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상의 하에 구직활동을 함께 하자고 얘기하지만 사실 성과를 증빙할 자료를 수집하기위한 작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화된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기에 그 정도 아쉬움과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도 조금은 듭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참여하든 사업유형에 따라 결말이 정해진 시나리오로 진로방향을 잡기때문에 세 번째, 네 번째 유형의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기 힘듭니다. 하지만 지금도 새로운 길을 나아가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꾸준히 발굴되길 바라며 상담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새로운 길을 제 속도로 걸어가보려 합니다. 오늘도 그 실험은 계속됩니다.